작업실의 모니터와 게시판 화면 앞에 선 주아의 EP13 헤더 이미지
EP 13 2026.07

데모 이후, EULA를 다시 쓴 이유

처음의 EULA는 지금보다 훨씬 짧았습니다. 우리가 만들고 싶은 걸 마음대로 넣어보는, 자기만족에 가까운 이야기였어요.

당시 본편은 내부적으로는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흔히 말하는 ‘지루하고 현학적’인 이야기였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신나서 제멋대로 떠드는 인상. 멋있는 문장과 주제는 잔뜩 있는데, 정작 독자가 따라가기 어려운 이야기였습니다.

데모도 같은 동기로 만들었습니다. 본편처럼 만들고 싶은 걸 일단 막 넣어본 결과물에 가까웠어요. 장난도 치고, 연출도 과하게 해보고, “이것도 되나?” 싶은 걸 계속 붙였습니다.

그런데 데모가 기대 이상의 주목을 받자 걱정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기껏 기대하고 와준 사람한테 "엥? 이게 뭐야?" 할 법한 걸 무작정 던져버릴 순 없었습니다.

다만 데모는 짧아서 그런 성격을 납득하고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본편은 사람들이 돈을 내고 긴 시간을 써가며 하는 게임이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도 괜찮을지 고민했습니다.

원래 EULA의 스토리가 나쁘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걸 전달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법 많은 사람이 기대해주고 있는데, 저희가 하고 싶은 말만 막무가내로 던져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의 EULA

구버전 EULA는 비 내리는 장면과 긴 독백으로 시작했습니다. 손바닥 위로 흐르는 빗물을 보면서, 사람이 느끼는 것과 기계가 계산하는 것이 뭐가 다른지 묻는 식이었어요. 그 뒤에는 그림을 만든다는 건 무엇인지, AI를 쓰면 그 과정이 달라지는지, 결과물이 같다면 만드는 방식도 같은 것으로 봐야 하는지 같은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이 질문들은 지금도 EULA 안에 남아 있습니다. 다만 예전 본편은 이를 주인공의 이야기보다 먼저 설명했습니다.

이야기 자체가 교조적이었고, 주인공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장치처럼 기계적으로 보였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계속 비관하다 보니 정을 붙이기 어려웠고, 불쾌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어요. 히로인들도 각자의 입장을 전달하는 역할이 뚜렷한 대신 실제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러면 메시지는 전달되더라도 독자에게 와닿지는 않죠.

현대 창작자가 처한 상황이나, 코딩하는 입장에서의 AI 활용 같은 이야기를 전달하기에는 참 좋은 구조였습니다. 하지만 게임이라기보다는 수필이나 산문에 가까웠고, 게임의 모양을 한 설교처럼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인공을 다시 만들기

주인공을 다시 만들자는 아이디어는 도움을 요청했던 글작가가 꺼냈습니다. 그의 지론은 이랬어요. 미소녀는 상위종족 같은 거라서, 당장 조금 덜떨어진 짓을 하더라도 그 이유를 보여줄 때까지 유예기간을 인정해준다는 것. 게다가 자기 취향에 맞는 주인공이라면 빠른 시간 안에 어떻게든 써낼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조건으로 여자 주인공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남자를 잘 못 그린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아가 나왔습니다.

게시판에서 화를 쏟아내는 주아의 첫 등장 장면

원래 버전의 주인공은 이제 막 실력을 키워나가는 초심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주인공이 겪는 문제를 단순히 실력 부족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아는 실제로 그림을 잘 그리지만, 그 실력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설정했습니다. 내면에는 갈등과 고통, 분노가 쌓여 있지만 타인에게는 잘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앓는 사람.

주아는 사람으로서는 모자란 구석이 많습니다. 감정을 멋있게 정리하지도 못하고, 가끔은 너무 유치하고, 말이 꼬이고, 본인이 한 말을 본인이 수습하지 못해요. 그런데 완전히 못 봐줄 정도는 아닙니다. 조금 모자라고, 조금 불쌍하고, 이상하게 계속 보게 되는 사람.

캐릭터를 잡을 때는 《봇치 더 록!》의 히토리와 《걸즈 밴드 크라이》의 니나를 많이 참고했습니다. 본편에 패러디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그 부분에 대한 리스펙입니다.

저희는 주인공과 이야기를 계속 보고 싶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웃거나 “좀 바보 같네~” 하며 보는 사이에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를 섞어 넣고 싶었습니다.

자기 그림에 직접 좋아요를 누르고 변명하는 주아의 장면

걱정도 좀 있었습니다. 원래부터 데모와 본편은 다른 이야기였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까지 크게 달라졌으니까요. 다만 적어도 지금 버전은 읽는 동안 지루하지 않았다는 점이 컸습니다. 가르치려 들지 않는 것 같다는 인상도 좋았고요. 그래서 이 방향으로 강행했습니다.


지금 버전에 남은 것과 아쉬움

구버전의 모든 것을 버린 건 아닙니다.

남은 것

AI 활용과 창작자가 처한 현실, 그림을 만드는 과정과 결과 사이의 간격, 다른 사람의 시선에 흔들리는 문제는 지금 버전에도 남아 있습니다. Organic과 AI 두 모드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Organic Organic 모드에서 AI 사용 여부를 묻는 민지의 장면
AI AI 모드에서 AI 사용 여부를 묻는 민지의 장면

대신 이런 문제를 먼저 설명하지 않고, 주아가 겪는 일과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카페에서 신난 주아를 바라보며 웃는 소민의 장면

남은 아쉬움

인물과 플레이 경험을 앞세우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AI 활용과 창작에 대한 담론을 깊게 다루는 데는 부족했다는 피드백도 있었습니다. 이 부분은 조금 실패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

그래서 이번 아이코이 라디오 코너에서는 그 부분을 조금이라도 보완하려고 했어요. 본편의 AI와 창작에 대한 이야기가 아쉬웠던 분들에게 아이코이 라디오가 조금이나마 마음에 드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라디오가 왜 필요했는지, 쓰면서 어디서 막혔는지는 다음 글에서 따로 이야기해볼게요.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